아트에세이

사랑을 알아 참 다행이다[박현주 아트에세이 ㉓]

지리산 화엄사. 그는 그곳에서 마음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 중학교 1학년, 아무 설명 없이 절에 맡겨진 아이. 아버지는 말했다. “정원씨, 잘 지내요.” 한 달을 울었다. 버려졌다고 믿었다. 그의 출가는 두 번이었다. 몸으로 한 번, 그리고 마음으로 한 번. 스물여덟. “그때 마음이 출가했습니다.” 울음이 많던 소년이 꽃스님이 되었다.용서는 상대를 향한 행위가 아니다. 나를 묶고 있던 마음을 풀어주는 일이다. 용서하지 않는 동안 우리는 상대가 아니라 미움 속에 갇힌 자기 자신과 함..

2026.04.11 01:01:00

시간을 견디는 몸…김상유, 무해한 힘[박현주 아트에세이 ㉒]

누각 위에 사람이 앉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쉽게 다가갈 수 없다. 김상유의 그림은 늘 이 거리에서 시작된다. 초록은 비현실적으로 맑고 건물은 단단하게 고정돼 있다. 그 안에 앉은 사람은 움직일 생각이 없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장면.1990년작 '대산루'. 경북 상주의 누각이다. 2층 구조의 건물 위, 그는 한 사람을 앉혀놓는다. 움직이지 않는 사람. 말하지 않는 사람. 그러나 가장 멀리 가 있는 사람. 이 연작은 한때 조용히 잊혀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

2026.04.04 11:08:44

역사는 체험된다…서용선의 ‘단종’ [박현주 아트에세이 ㉑]

빠른 물살에 떠내려가는 몸. 얼굴은 사라지고, 손만 남는다. 그리고 그 곁으로 거침없이 헤엄치는 한 사람.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 엄흥도. 권력은 죽은 몸을 버리지만 인간은 끝내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다. “여기 강물에 단종이 빠져 죽었다는군.” 1986년 여름, 영월 서강. 강물은 조용히 흐르고 있었고, 그 위로 한 소년의 몸이 가라앉고 있었다. 왕이었으나 아무것도 지킬 수 없었던 존재. 그날, 화가 서용선의 내부에서는 하나의 이미지가 태어났다. 드로잉은 빠르다. 생각보다 먼저 ..

2026.03.28 01:01:00

찬란한 허무함…데이미언 허스트 '다이아몬드 해골’ [박현주 아트에세이 ⑳]

죽음은 이렇게까지 아름다워질 수 있는가.이건 신의 사랑인가, 인간의 집착인가.유리 케이스 안, 해골 하나가 빛난다. 백금 위에 촘촘히 박힌 다이아몬드가 빛을 쪼갠다. 눈은 그 반짝임에 붙들린다. 잠시, 우리는 그것을 보석처럼 바라본다.그러나 오래 보면 이내 알게 된다. 그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이 해골은 죽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덮는다. 반짝임은 공포를 가리고, 가격은 질문을 밀어낸다.죽음은 더 이상 사유가 아니라 전시되는 이미지가 된다.우리는 그것을 소..

2026.03.21 01:01:00

봄은 꽃이 아니라 사랑이다 [박현주 아트에세이 ⑲]

꽃이 먼저 피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 먼저 피어난다.마르크 샤갈의 그림을 보면 그렇다.국내 미술품 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샤갈의 ‘꽃다발’(94억)도 그렇다.푸른 화면. 흐드러진 꽃다발. 그리고 공중에 떠 있는 연인.꽃은 아래에서 피고 사랑은 그 위로 올라간다.샤갈이 평생 사랑한 여인, 벨라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그는 이렇게 썼다. “그녀의 눈동자를 처음 본 순간 내 삶의 모든 색이 달라졌다.”샤갈의 그림에서 연인들이 공중에 떠 있는 이유도 어쩌면 그 사랑..

2026.03.14 01:01:00

봄은 달력으로 오지 않는다 [박현주 아트에세이 ⑱]

봄은 달력으로 오지 않는다.어느 날 문득 나무 한 그루가 먼저 알아차린다.아직 바람은 차갑고 사람들은 코트를 벗지 못했지만 가지 끝에서는 이미 꽃이 열린다.빈센트 반 고흐의 ‘꽃피는 아몬드나무’는 바로 그 순간의 그림이다.짙은 파란 하늘 아래 메마른 가지들이 가볍게 뻗어 있고 그 위에 흰 꽃들이 조용히 피어 있다.잎도 나지 않은 가지. 겨울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는 나무.그러나 그 위에서 생명은 이미 시작되었다.1890년 2월 고흐의 동생 테오에게 아들이 태어..

2026.03.07 00:01:00

존재는 마찰에서 생긴다…엄정순, ‘보푸라기 회화’[박현주 아트에세이 ⑰]

보푸라기는 마찰의 흔적이다.옷감이 닳을 때 생겨나는 작은 덩어리. 정돈된 표면에서 밀려난 잔여물. 그러나 그것은 결함이 아니다. 어딘가와 맞닿았다는 증거다.마찰이 없으면 보푸라기도 없다. 스침이 없으면 흔적도 없다. 완벽하게 매끈한 표면은 아직 아무것도 만나지 않은 상태일지도 모른다.마찰은 관계를 만든다. 관계는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흔적은 존재를 드러낸다.우리는 스스로를 하나의 중심, 단단한 덩어리로 믿지만 실은 끊임없이 닳고 긁히며 생성되는 느슨한 표면에 가깝다...

2026.02.28 01:01:00

AI 시대, 나는 누구인가…권순철 ‘얼굴’· ‘넋’ [박현주 아트에세이 ⑯]

우리는 지금 얼굴을 쉽게 고친다. 주름은 지워지고, 표정은 합성된다. AI는 더 나은 버전의 나를 몇 초 만에 만들어낸다.매끈한 이미지가 넘쳐난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는 흐려진다.그럴수록 권순철의 화면은 거칠다.물감은 두껍게 쌓이고, 다시 긁히며 균열을 드러낸다. 형상은 해체되고, 얼굴은 무너진다.그의 신작 ‘넋’에서 남아 있는 것은 인물이 아니다. 물감의 덩어리, 존재의 잔존, 시간이 눌러 만든 압력이다.두터운 마티에르는 살처럼 들러붙고, 덧칠의 흔적은 신체의 움직..

2026.02.14 01:01:00

이것은 얼굴인가, 도끼인가…최종태 ‘Face’ [박현주 아트에세이 ⑮]

도끼처럼 생긴 얼굴 앞에 섰다. 사람의 얼굴이라 부르기엔 납작하고, 조각이라 말하기엔 지나치게 침묵했다.날은 가로로 뻗고 목은 가늘게 떨어진다. 베기 위해 태어난 형상 같지만 이 얼굴은 아무것도 베지 않는다. 다만 서 있을 뿐이다.이것은 얼굴인가, 도구인가. 인간인가, 시대의 잔해인가. 질문은 끝내 답을 얻지 못한다. 이 얼굴은 설명을 거부하고 침묵을 선택한다.구순을 넘긴 최종태는 이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조각이란, 모르는 것이다.”설명은 거기서 멈춘다. ..

2026.02.07 01:01:00

“권력은 결국 무늬에 불과하다"…까치도와 더피, 호피[박현주 아트에세이 ⑭]

민화는 조선의 ‘전통 회화’가 아니다. 민중이 세계를 이해하고, 웃고, 비틀고, 끝내 살아내기 위해 만들어낸 가장 즉흥적이고 대담한 시각 언어였다.까치호랑이에서 권력은 무너진다.정확히 말하면, 웃음 속으로 미끄러진다.왕의 상징이던 호랑이는더 이상 위에서 내려다보지 않는다.웅크린 몸, 둥근 눈, 어딘가 어색한 비례.위엄 대신 당황이 있고, 공포 대신 망설임이 있다.그 앞에서 까치는 울어댄다.작고 가벼운 존재가,가장 큰 존재를 향해 먼저 소리를 낸다. 이 장면은 ..

2026.01.31 01:01:00

'세필'이라는 노동, 김홍주 수행 미학 [박현주 아트에세이 ⑬]

수만 번의 선. 빠르지 않다. 서두르지도 않는다.김홍주의 회화 앞에 서면 나는 오래된 질문을 되뇐다.그림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혹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되는가.가까이 다가가면 화면은 해체된다.연필과 볼펜, 아크릴 물감. 수천 개의 선이 겹치고 스치며 질감이 된다.한 발짝 물러서면 선들은 하나의 덩어리로 응결된다.의미를 읽기 전에 감각이 먼저 도착한다.김홍주는 말한다. 자신은 그림에 명확한 메시지를 담지 않는다고.그러나 그의 화면에는 설명 ..

2026.01.24 01:01:00

블루마운틴과 낙서, 그 존재의 마찰면[박현주 아트에세이⑫]

산은 높지 않았다. 날카롭게 솟지도, 극적으로 찢어지지도 않았다.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야생지대, 사암 급경사면과 폭포수가 열기를 식혀주는 열대우림 계곡. 블루마운틴의 능선은 마치 오래전부터 그렇게 누워 있었던 것처럼 평평하고 조용했다.그 순간, 깨닫는다. 이곳의 산은 형태가 아니라 시간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한국의 산이 의지처럼 솟아 있다면, 이곳의 산은 체념처럼 펼쳐져 있다.밀어 올린 힘이 아니라 끝없이 깎이고 남겨진 결과. 시간이 포기하지 않고 반복한 흔적이다.블루마..

2026.01.08 18:38:24

말의 해, 달리는 해… ‘군마도’의 에너지[박현주 아트에세이 ⑪]

치켜든 목, 뒤틀린 몸, 날뛰는 근육. 붓질 몇 번으로 완결된 갈기와 꼬리는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듯하다.군마(群馬). 방향을 묻지 않고, 이유를 따지지 않은 채, 서로의 숨결에 밀려 앞으로 쏟아지는 집단의 에너지가 강렬하다.2021년 이건희컬렉션으로 공개된 한국화가 김기창(1913~2001)의 ‘군마도’다. 1955년작, 가로 5미터에 달하는 4폭 병풍. 수묵채색 위로 여섯 마리의 말이 원을 그리며 격렬하게 뒤엉킨다.이 작품은 전후(戰後)의 풍경이다. 폐허 위에서 다시 달려야 했던 시대, ..

2026.01.03 01:00:00

긁혀서 드러난 빛…곽수영 '부동의 여행'[박현주 아트에세이 ⑩]

곽수영의 그림 앞에 서면 걷고 있지 않은데도,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발은 멈춰 있지만, 시선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간다.Voyage Immobile. 작품 제목은 ‘부동의 여행’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움직이지 않는 여행이다.캔버스 위에는 분명 풍경이 있다. 그러나 그 풍경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고딕 성당의 아치처럼 보이는 구조, 끝없이 반복되는 기둥과 통로, 그리고 그 끝에서 겨우 살아남은 듯한 빛.그러나 이 빛은 ‘비추는 빛’이 아니다. 긁혀서 드러난 빛, 덮였다..

2025.12.27 01:01:00

“올해도 수고했다”…서울라이트 DDP2025 [박현주 아트에세이⑨]

빛은 벽을 타고 흐르고, 도시는 잠시 동화가 된다.밤의 DDP는 더 이상 건축이 아니다.곡면 위에 얹힌 것은 영상이 아니라 감정의 패턴이다.캐릭터의 눈, 리본의 결, 별빛의 궤적이 자하 하디드의 곡선을 타고 미끄러진다.이곳에서 벽은 스크린이 되고, 스크린은 다시 도시의 피부가 된다.미디어파사드는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시가 스스로를 장식하는 방식이다.DDP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옷을 갈아입은 것이 아니다. 도시는 잠시, 유년의 감각으로 회귀했다. ..

2025.12.20 01:01:00

귀여움을 빚는 색의 파동…아야코 록카쿠 회화의 촉각[박현주 아트에세이⑧]

색은 종종 감정보다 먼저 몸을 흔든다. 아야코 록카쿠의 화면을 마주할 때, 그 사실이 즉각적으로 이해된다. 핑크와 옐로, 블루와 라임이 일렁이며 밀려오는 파동은 시각보다 먼저 신체의 표면을 건드린다.그의 회화는 손바닥이 구축해낸 세계다. 붓 대신 손으로 밀어 올린 선과 색, 압력의 흔적과 물감의 속도가 켜켜이 쌓여 하나의 감각적 지층이 된다. 그 지층은 그림이라기보다 살아 있는 피부에 가깝다.그래서 록카쿠의 화면은 ‘귀여움’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귀여움 아래에는 충동, 불안, 환희가 동시에 끓고..

2025.12.13 01:01:00

사랑은 먼저 ‘나’를 건너는 일…이소연 자화상[박현주 아트에세이⑦]

촛불이 흔들리는 방, 어지럽게 놓인 사물들, 그리고 그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한 소녀. 이소연의 회화 속 장면들은 마치 늦은 밤 우리의 마음을 은근히 들여다본다. 조현화랑에서 열리는 ‘Love of This Age(이 시대의 사랑)’은 거창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며 감당해야 하는 감정의 무게와 얼굴들의 이야기에 가깝다.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지만, 거울 앞에 앉아 그린 전통적 자화상은 아니다. 오늘을 버티기 위해 바꿔 끼는 여러 겹의 얼굴들 어린 소녀일 때도, 낯선 존..

2025.12.06 01:01:00

상처로 꿰매고 빚은 생존의 광택…루이즈 부르주아[박현주 아트에세이 ⑥]

“난 지옥에 다녀왔다. 그리고 그건… 정말 멋졌다.” 호암미술관 전시실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우리는 곧장 ‘몸에서 시작된 세계’ 한가운데로 던져진다.늘어진 팔다리, 비틀린 몸통, 재봉선이 스며 있는 신체의 파편들. 누군가는 허공에서 서로를 껴안고, 누군가는 다리만 남아 바닥에 닿지 못한 채 흔들린다. 그 형상들은 단순한 조각이 아니라, 한 인간이 견뎌온 감정의 잔해이자 기록이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부르주아 자신. 동시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몸들까지.상처는 결국 형태가 된다..

2025.11.29 01:01:00

이집트 대박물관, 투탕카몬을 바라보는 인간의 얼굴들[박현주 아트에세이⑤]

이집트 대박물관(GEM·Grand Egyptian Museum)은 인류 문명사의 거대한 용광로다. 들어서자마자 람세스 2세가 가장 먼저 우리를 ‘호명’한다.입구 정면에 선 거대한 석신체는 중력보다 오래된 무게로 관람객을 붙잡는다.금빛이 스며든 벽면, 가느다란 빛의 기둥들. 그 아래에서 사람은 한없이 작아진다.마치 ‘시간의 대합실’을 통과하는 존재처럼, 문명은 늘 인간을 먼저 낮추고, 그다음에 말문을 연다. “24시간 잠을 안 자고 봐도 70일이 걸린다”는 이집트 대박물관의 압권은 투탕..

2025.11.22 01:24:20

달리는 인간, 김아영 ‘딜리버리 댄서’[박현주 아트에세이 ④]

세상은 너무 빠르게 움직인다. 휴대폰의 진동처럼, 도시의 심장은 쉴 틈 없이 뛰고,인간의 몸은 그 속도에 몸을 맡긴다. 그러다 어느새, 우리는 기계의 일부가 된다. 미디어아티스트 김아영의 영상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팬데믹 시기, 그녀는 실제 배달노동자들을 따라 달리며‘움직임’ 속에 숨은 인간의 존엄을 기록했다. 그 질주는 단순한 생계의 몸부림이 아니었다. 삶을 이어가는 가장 원초적 형태의 몸의 언어였다. ‘딜리버리 댄서’ 3부작은 AI와 게임엔진,실사 촬영이 교차하는 복합적 구조 속에서 ..

2025.11.15 0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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