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에세이

오로라처럼 스미는 빛…김택상의 '물의 회화'[박현주 아트에세이 ㉜]

오로라가 내려앉은 것 같다.분홍과 노랑, 푸른빛이 경계 없이 번진다.화려한데 요란하지 않다.신비로운 빛이 물안개처럼 마음에 스민다.김택상의 그림이다.그런데 이 빛은 붓으로 그린 것이 아니다.물에 담가 만들었다.김택상은 물에 희석한 안료를 캔버스에 스며들게 한다.색이 가라앉으면 말린다.다시 물에 담근다.또 기다린다.물과 안료, 햇빛과 공기, 중력이 함께 그림을 만든다.화가는 그 시간을 재촉하지 않는다.그의 ‘Breathing Lig..

2026.08.22 00:01:00

찐득찐득함을 건너간 그림…강요배 '소소, 반색'[박현주 아트에세이 ㉛]

그림을 그린다는 건 무엇일까.강요배는 말했다.“자기가 모르는 자기를 끄집어내는 거예요.”낚시와 같다고 했다.낚싯줄을 드리우지만 무엇이 올라올지는 모른다.기다리고, 바라보고, 마음에 오래 담아둔다.그러다 어느 순간 무언가 걸린다.내가 그리려 했던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지만 나도 몰랐던 것.마음 한 조각이다.강요배의 그림에는 바람이 많다.바람은 보이지 않는다.나무가 흔들리고 파도가 일고 구름이 밀려가는 것을 보고서야 바..

2026.08.15 00:01:00

공기반 빛반…이대원이 그린 생의 찬미[박현주 아트에세이 ㉚]

서두르지 않는다.점 하나를 찍고 또 하나를 찍는다.빨강 옆에 파랑을 놓고, 노랑 사이로 초록을 놓는다.점점점.툭툭툭.이대원의 과수원은 그렇게 조금씩 차오른다.가까이에서 보면 추상이다.몇 걸음 물러서면 나무가 되고 들판이 되고 과수원이 된다.말년으로 갈수록 점은 길어진다.짧은 색선들이 위에서 아래로 쏟아진다.나뭇잎 사이로 내리꽂히는 햇빛 같고,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같다.풍경을 묘사하던 붓질이 어느 순간 자연의 리듬이 된다.꽃은 만개하..

2026.08.08 00:01:00

"말이 없어 좋다"…침묵으로 산을 그린 화가, 유영국 [박현주 아트에세이 ㉙]

"왜 추상을 합니까?"유영국은 말했다."말이 없어 좋다."짧은 대답이었다.그러나그 한마디는쉽게 이해되지 않았다.우리는그림 앞에 서면무언가를 읽으려 한다.무엇을 그렸는지,무슨 뜻인지,작가는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그림을말로 바꾸려 한다.유영국은말 대신 색을 놓았다.선을 놓았다.삼각형 하나를 놓았다.산이었다.그러나그 산에는나무도,바위도,계곡도 없다.산을 ..

2026.08.01 00:01:00

사랑받고 싶은 우리 자화상…김원근의 조각 [박현주 아트에세이 ㉘]

험상궂은 얼굴이다.굵은 눈썹. 날카로운 눈빛. 꽃무늬 셔츠에 굵은 금목걸이.처음엔 조폭 같다고 했다. 흉물스럽다는 말도 들었다.그런데 오래 바라보면 표정이 달라진다.위협하는 얼굴이 아니다.어딘가 쓸쓸하고, 조금은 무심하고, 오래 기다린 사람 같다.김원근의 조각은 첫인상과 끝인상이 다르다.가까이 다가갈수록 거칠음은 사라지고, 사람만 남는다.그의 조각은 성자가 아니라 우리다.조각가 김원근도 그랬다.돌공장에서 일했고, 가구를 배달했..

2026.07.11 00:01:00

환각을 그리는 사람…화가 이근민 [박현주 아트에세이 ㉗]

우리는 병을 고치려 한다.이름을 붙이고, 진단하고, 정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하지만 모든 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어떤 상처는 몸보다 마음에 오래 남고,어떤 기억은 눈을 감아도 끝내 지워지지 않는다.화가 이근민은 환각을 보았다.피와 살, 장기와 근육, 형태를 잃은 몸들.세상은 그것을 병이라 불렀다.그는 그것을 그림으로 옮겼다.환각은 숨겨야 할 증상이 아니라, 그려야 할 언어가 되었다.붉은 화면은 낯설다. 아프다. 불편하..

2026.07.04 00:01:00

깨달음은 앉아 있는가, 걸어가는가 [박현주 아트에세이 ㉖]

그는 생각을 마친 사람처럼 걸어간다.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어메이징 타일랜드'에서 만난 수코타이 시대의 '걷는 부처'다.오른발을 살짝 들어 올린 자세는 멈춤과 이동 사이, 그 찰나의 시간을 붙잡고 있다.옷자락은 바람을 머금은 듯 몸을 따라 흐른다.청동으로 만들었는데도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마치 지금 막 어디론가 향해 가는 사람 같다.우리는 부처를 생각하는 존재로 기억한다.국립중앙박물관의 반가사유상처럼.한쪽 다리를 올리고 턱을 괸 채 침묵 속에 앉아 있는 모습. ..

2026.06.27 00:01:00

호크니는 왜 수영장을 그렸을까 [박현주 아트에세이 ㉕]

1964년, 영국 청년 데이비드 호크니는 로스앤젤레스로 갔다.비와 안개, 회색 하늘에 익숙했던 그에게 캘리포니아의 햇빛은 거의 충격에 가까웠다.하늘은 파랬고, 야자수는 높았으며, 수영장은 어디에나 있었다.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평생 물을 그리기 시작했다.이상한 일이다.수영장은 사각형이다.집도 사각형이다.야자수도 가만히 서 있다.그런데 물만 움직인다.물은 형태가 없다.빛에 따라 달라지고, 바람에 따라 흔들리고, 사람이 뛰어들면 산산이 부서진다.호크..

2026.06.20 00:01:00

색은 멈추지 않는다…다시 열린 이두식의 '축제' [박현주 아트에세이 ㉔]

죽음 이후에도, 색은 멈추지 않는다. 붉은색이 먼저 터진다. 그 위로 초록이 얹히고, 노랑이 번진다. 검은 선들이 지나가며 화면을 붙잡는다. 형태는 없다. 그런데 멈추지 않는다. 쏟아진다.이두식의 그림은 늘 그랬다. 무언가 끝난 자리 같고,막 시작된 장면 같기도 한 곳. 그 정리되지 않은 생명력,그래서 축제다.오방색은 한 번 터지고 나면캔버스 안에 갇히지 않는다. 보는 순간마다 다시 흔들리고, 다시 번지고, 다시 살아난다. 그의 축제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현재형의 감각이다..

2026.04.18 01:01:00

사랑을 알아 참 다행이다[박현주 아트에세이 ㉓]

지리산 화엄사. 그는 그곳에서 마음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 중학교 1학년, 아무 설명 없이 절에 맡겨진 아이. 아버지는 말했다. “정원씨, 잘 지내요.” 한 달을 울었다. 버려졌다고 믿었다. 그의 출가는 두 번이었다. 몸으로 한 번, 그리고 마음으로 한 번. 스물여덟. “그때 마음이 출가했습니다.” 울음이 많던 소년이 꽃스님이 되었다.용서는 상대를 향한 행위가 아니다. 나를 묶고 있던 마음을 풀어주는 일이다. 용서하지 않는 동안 우리는 상대가 아니라 미움 속에 갇힌 자기 자신과 함..

2026.04.11 01:01:00

시간을 견디는 몸…김상유, 무해한 힘[박현주 아트에세이 ㉒]

누각 위에 사람이 앉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쉽게 다가갈 수 없다. 김상유의 그림은 늘 이 거리에서 시작된다. 초록은 비현실적으로 맑고 건물은 단단하게 고정돼 있다. 그 안에 앉은 사람은 움직일 생각이 없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장면.1990년작 '대산루'. 경북 상주의 누각이다. 2층 구조의 건물 위, 그는 한 사람을 앉혀놓는다. 움직이지 않는 사람. 말하지 않는 사람. 그러나 가장 멀리 가 있는 사람. 이 연작은 한때 조용히 잊혀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

2026.04.04 11:08:44

역사는 체험된다…서용선의 ‘단종’ [박현주 아트에세이 ㉑]

빠른 물살에 떠내려가는 몸. 얼굴은 사라지고, 손만 남는다. 그리고 그 곁으로 거침없이 헤엄치는 한 사람.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 엄흥도. 권력은 죽은 몸을 버리지만 인간은 끝내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다. “여기 강물에 단종이 빠져 죽었다는군.” 1986년 여름, 영월 서강. 강물은 조용히 흐르고 있었고, 그 위로 한 소년의 몸이 가라앉고 있었다. 왕이었으나 아무것도 지킬 수 없었던 존재. 그날, 화가 서용선의 내부에서는 하나의 이미지가 태어났다. 드로잉은 빠르다. 생각보다 먼저 ..

2026.03.28 01:01:00

찬란한 허무함…데이미언 허스트 '다이아몬드 해골’ [박현주 아트에세이 ⑳]

죽음은 이렇게까지 아름다워질 수 있는가.이건 신의 사랑인가, 인간의 집착인가.유리 케이스 안, 해골 하나가 빛난다. 백금 위에 촘촘히 박힌 다이아몬드가 빛을 쪼갠다. 눈은 그 반짝임에 붙들린다. 잠시, 우리는 그것을 보석처럼 바라본다.그러나 오래 보면 이내 알게 된다. 그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이 해골은 죽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덮는다. 반짝임은 공포를 가리고, 가격은 질문을 밀어낸다.죽음은 더 이상 사유가 아니라 전시되는 이미지가 된다.우리는 그것을 소..

2026.03.21 01:01:00

봄은 꽃이 아니라 사랑이다 [박현주 아트에세이 ⑲]

꽃이 먼저 피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 먼저 피어난다.마르크 샤갈의 그림을 보면 그렇다.국내 미술품 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샤갈의 ‘꽃다발’(94억)도 그렇다.푸른 화면. 흐드러진 꽃다발. 그리고 공중에 떠 있는 연인.꽃은 아래에서 피고 사랑은 그 위로 올라간다.샤갈이 평생 사랑한 여인, 벨라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그는 이렇게 썼다. “그녀의 눈동자를 처음 본 순간 내 삶의 모든 색이 달라졌다.”샤갈의 그림에서 연인들이 공중에 떠 있는 이유도 어쩌면 그 사랑..

2026.03.14 01:01:00

봄은 달력으로 오지 않는다 [박현주 아트에세이 ⑱]

봄은 달력으로 오지 않는다.어느 날 문득 나무 한 그루가 먼저 알아차린다.아직 바람은 차갑고 사람들은 코트를 벗지 못했지만 가지 끝에서는 이미 꽃이 열린다.빈센트 반 고흐의 ‘꽃피는 아몬드나무’는 바로 그 순간의 그림이다.짙은 파란 하늘 아래 메마른 가지들이 가볍게 뻗어 있고 그 위에 흰 꽃들이 조용히 피어 있다.잎도 나지 않은 가지. 겨울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는 나무.그러나 그 위에서 생명은 이미 시작되었다.1890년 2월 고흐의 동생 테오에게 아들이 태어..

2026.03.07 00:01:00

존재는 마찰에서 생긴다…엄정순, ‘보푸라기 회화’[박현주 아트에세이 ⑰]

보푸라기는 마찰의 흔적이다.옷감이 닳을 때 생겨나는 작은 덩어리. 정돈된 표면에서 밀려난 잔여물. 그러나 그것은 결함이 아니다. 어딘가와 맞닿았다는 증거다.마찰이 없으면 보푸라기도 없다. 스침이 없으면 흔적도 없다. 완벽하게 매끈한 표면은 아직 아무것도 만나지 않은 상태일지도 모른다.마찰은 관계를 만든다. 관계는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흔적은 존재를 드러낸다.우리는 스스로를 하나의 중심, 단단한 덩어리로 믿지만 실은 끊임없이 닳고 긁히며 생성되는 느슨한 표면에 가깝다...

2026.02.28 01:01:00

상단으로 이동
로딩중로딩아이콘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