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이중섭은 없다”…윤범모, 70년 ‘국민화가 신화’ 거꾸로 보기
등록 2026/09/30 14:26:00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천재 이중섭은 없다.”
황소를 그린 국민화가, 담뱃갑 은지에 그림을 새긴 가난한 천재, 일본인 아내와 두 아들을 그리워한 순애보의 주인공. 전쟁과 가난 속에서 불꽃처럼 살다 마흔에 세상을 떠난 비운의 예술가.
70년 동안 이중섭(1916~1956)을 따라다닌 수식어들이다. 미술사학자 윤범모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이사가 이 익숙한 ‘이중섭 신화’를 거꾸로 읽는다.
이중섭 탄생 110주년이자 사망 70주년을 맞아 펴낸 '이중섭 신화, 거꾸로 보기'에서다.
윤 대표는 이중섭의 예술적 성취를 부정하는 대신 ‘천재’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화가의 성장 과정에 주목한다.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야생의 천재’가 아니라 교육과 훈련,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쳐 자신의 조형언어를 만들어간 ‘정진형 화가’였다는 주장이다.
그가 주목한 단어는 이중섭이 스스로를 지칭했던 ‘화공(畫工)’이다.
윤 대표는 책에서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천재라기보다, 현실과 대응하면서 꾸준히 작업한 그야말로 ‘정직한 화공’이었다”며 “정직한 화공이라는 표현이 천재라는 표현보다 이중섭 예술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데 더 좋다고 믿는다”고 썼다.
책은 평양의 문화적 환경과 오산학교 시절부터 일본 유학과 전위미술 경험, 자유미술가협회 활동까지 이중섭이 화가로 성장한 과정을 추적한다.
류영모와 함석헌, 임용련·백남순 부부의 미술교육을 비롯해 김환기·유영국·문학수 등 동시대 화가들과의 관계도 살핀다. 특히 1930~40년대 일본에서 이미 소를 소재로 작품을 발표하고 자유미술가협회에 참여했던 기록을 통해 이중섭을 당대 동아시아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서 성장한 전문 화가로 바라본다.
기존 이중섭 연구와 대중적 이미지에 대한 문제 제기도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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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것이 일본인 연인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 그림이다. 윤 대표는 이를 모두 독립적인 미술작품으로 평가하는 관행에 질문을 던진다. 본래 연인에게 보낸 사적인 연서이자 자료라는 성격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1940년대 초 엽서화와 10여 년 뒤 피란기에 제작한 은지화 사이의 조형적 차이도 주목한다. 저자는 이 차이야말로 이중섭이 처음부터 완성된 천재가 아니라 현실과 고통을 통과하며 끊임없이 성장한 화가였다는 증거로 읽는다.
마사코와의 사랑 역시 낭만적인 ‘순애보’에만 가두지 않는다. 편지에 나타난 사랑과 그리움뿐 아니라 의존과 집착,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했던 좌절 등 한 인간의 복합적인 면모를 함께 들여다본다.
신화를 걷어낸 책은 다시 그림으로 돌아간다.
황소와 아이들, 물고기, 복숭아, 닭과 까마귀, 가족과 부부. 반복해서 등장하는 도상을 이중섭의 호 ‘대향(大鄕)’, 즉 ‘큰 고향’이라는 개념으로 읽는다. 분단으로 고향과 어머니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전쟁으로 가족과 헤어진 이중섭에게 ‘대향’은 실제 장소를 넘어 잃어버린 세계이자 돌아가고 싶은 이상향이었다는 해석이다.
윤 대표는 “이중섭 신화는 세월이 흐르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윤색되어 증폭되었다”며 전문적인 연구보다 앞선 일방적인 예찬이 오히려 “이중섭 예술의 실체 접근에 방해가 될 정도”였다고 지적한다.
이 책 '이중섭 신화, 거꾸로 보기'가 던지는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왜 이중섭을 ‘천재’라고 불러야 했는가.
신화를 걷어낸 자리에 남는 것은 타고난 천재라는 수사가 아니라 식민지와 해방, 분단과 전쟁을 통과하면서도 자신의 그림을 만들기 위해 정진했던 한 화가다. 어쩌면 ‘천재 이중섭’이라는 찬사는 그를 높이는 가장 쉬운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천재라는 말로 설명해버리는 순간, 한 인간이 평생 들인 노력과 성장의 시간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신화의 주인공이 아니라 시대를 통과하며 그림을 그린 사람. 이 책은 ‘국민화가 이중섭’을 다시 인간 이중섭에게 돌려주는 평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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