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 펴자 몰아친 1300석의 눈보라…이자람 '눈, 눈, 눈’[객석에서]
등록 2026/10/25 16:09:49
톨스토이 단편 '주인과 일꾼' 판소리로 재창작
프랑스 아비뇽 공식 초청작…1300석 대극장 귀환
무대 장치 없이 부채와 북 하나로 영하 28도 설원 재현
관객이 내뱉는 눈보라…'일 고수 이 명창 삼 청중' 증명
![[서울=뉴시스]지난 23~24일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대극장 LG시그니처홀에서 이자람 판소리 '눈, 눈, 눈'이 펼쳐졌다. 소리꾼 이자람의 공연 장면. (사진=LG아트센터 제공) 2026. 10. 25. photo@newsis.com](https://img1.newsis.com/2026/10/25/NISI20261025_0002273152_web.jpg?rnd=20261025151002)
[서울=뉴시스]지난 23~24일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대극장 LG시그니처홀에서 이자람 판소리 '눈, 눈, 눈'이 펼쳐졌다. 소리꾼 이자람의 공연 장면. (사진=LG아트센터 제공) 2026. 10. 25.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최희정 기자 = "여러분 쉬시는 동안 까먹으셨을까 봐 말씀드리는데, 이곳 온도가 지금 영하 28도예요. 러시아 설원입니다. 잊지 않으셨죠?"
선선한 가을, 무대 위 소리꾼 이자람(47)의 능청스러운 재담에 대극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지난 23일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LG시그니처홀에서 이자람 판소리 '눈, 눈, 눈'이 펼쳐졌다. 지난해 국내 초연 이후 올해 7월 아비뇽 페스티벌 공식 초청작으로 올라 프랑스 현지 관객들로부터 '아비뇽 록스타'라는 찬사를 들었던 이자람. 그가 이번에는 아비뇽 900여석 극장보다 더 큰 1300여석 대극장으로 무대를 옮겨 한국 관객들을 다시 만났다.
'눈, 눈, 눈'은 러시아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1828~1910)의 단편 소설 '주인과 일꾼'을 이자람이 판소리로 재창작했다. 이윤을 최고 덕목으로 삼는 상인 '바실리'가 숲을 사기 위해 하인 니키타와 한겨울 길을 나섰다가 눈보라 속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는 하룻밤의 이야기를 담았다.
어두운 무대에는 부채를 든 이자람과 북을 잡은 고수 이준형 두 사람만 있을 뿐, 화려한 무대 장치는 전혀 없다. 이따금씩 흰 연기가 무대 바닥을 타고 올라오지만, 1800년대 차갑게 얼어붙은 러시아 시골마을 설원을 묘사하는 것은 오직 소리와 북 장단이다.
이자람은 되레 관객들에게 눈보라가 매섭게 칠 때마다 '쉬잇' 소리를 내달라고 요청한다.
"제가 딱 이 타이밍에 여러분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지금 눈보라 소리 혼자 내고 다 하는 거 보셨죠? 너무 숨이 차요. 부채를 제가 피고서 이렇게 하면 '약'이에요. 한번 해볼까요?"
![[서울=뉴시스]지난 23~24일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대극장 LG시그니처홀에서 이자람 판소리 '눈, 눈, 눈'이 펼쳐졌다. 소리꾼 이자람의 공연 장면. (사진=LG아트센터 제공) 2026. 10. 25. photo@newsis.com](https://img1.newsis.com/2026/10/25/NISI20261025_0002273150_web.jpg?rnd=20261025150927)
[서울=뉴시스]지난 23~24일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대극장 LG시그니처홀에서 이자람 판소리 '눈, 눈, 눈'이 펼쳐졌다. 소리꾼 이자람의 공연 장면. (사진=LG아트센터 제공) 2026. 10. 25. [email protected]
관객들의 반응을 본 이자람은 "여기서 위아래로 흔들면 '중'이다. 이걸 갑자기 이렇게 크게 흔들면 '강'이다"라면서 객석을 지휘한다.
이자람이 부채를 펼 때마다 '쉬이이이'라면서 눈보라 소리를 내던 관객들은 설원 한가운데로 속절없이 빨려 들어간다. 프랑스 르몽드가 "판소리의 뜨거운 존재감"이라고 극찬하고, 리베라시옹이 "이자람은 단 한 번의 눈빛으로 객석 전체를 사로잡았고, 그 순간 우리는 완전히 매료되었다"라고 호평한 그대로다.
이자람은 객석을 향해 "판소리에는 옛날부터 일 '고수' 이 '명창' 삼 '청중'이란 말이 있었다"며 "여러분이 너무 잘 봐주셔서 제가 흥분이 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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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바실리와 하인 니키타가 타는 말 '제티'를 묘사할 때 몰입감은 최고조에 달한다. 이자람은 말의 움직임과 눈보라를 체화하기 위해 직접 3개월간 승마를 배우고 몽골의 설원까지 다녀왔다.
"제티에 갑자기 생기가 피어 두 개의 콧구멍이 바쁘게 움직이고 부드러운 주둥이가 실실 당근을 잘라서 꼬득꼬득 냠냠 먹고…"
이자람은 음을 꺾고 흘려내리는 판소리 특유의 '시김새'와 깊은 호흡을 교차하며 짐승의 울부짖음부터 인간의 탐욕까지 빚어낸다.
![[서울=뉴시스]지난 23~24일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대극장 LG시그니처홀에서 이자람 판소리 '눈, 눈, 눈'이 펼쳐졌다. 소리꾼 이자람의 공연 장면. (사진=LG아트센터 제공) 2026. 10. 25. photo@newsis.com](https://img1.newsis.com/2026/10/25/NISI20261025_0002273153_web.jpg?rnd=20261025151016)
[서울=뉴시스]지난 23~24일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대극장 LG시그니처홀에서 이자람 판소리 '눈, 눈, 눈'이 펼쳐졌다. 소리꾼 이자람의 공연 장면. (사진=LG아트센터 제공) 2026. 10. 25. [email protected]
극의 절정은 칠흑 같은 눈더미 속에 고립된 2부다. 얼어붙어 가는 일꾼 니키타를 발견한 바실리는 평생 좇던 8500루블의 숲과 상점 대신, 자신의 겉옷을 풀어헤치고 니키타의 몸 위로 엎드린다.
"내가 널 구하냐, 네가 날 구하냐"며 실성한 듯 웃음을 터뜨리는 바실리의 모습은 이윤만 좇던 상인이 죽음의 문턱에서 비로소 타인을 껴안는 모순적인 찰나를 보여준다. 평생 손해 보기 싫어하던 사내가 타인을 위해 기꺼이 돌처럼 굳어버린 결말은, 어떠한 무대 장치 없이 오직 소리만으로 객석에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19세기 러시아 대문호의 차가운 설원은 부채 하나를 쥔 소리꾼의 뜨거운 숨결을 통해 서울 무대 위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24일 LG아트센터에서 막을 내린 이자람 판소리 '눈, 눈, 눈'은 오는 12월 12~13일 수원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을 이어간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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