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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가 무너진다"…'오디세이' 속 문명 붕괴 왜?[사이언스 오디세이③]

등록 2026/09/13 14:00:00

시대 배경 기원전 1200년 전후…동지중해 초강대국 연쇄 도미노 파멸

대서양 기후 변화로 3년 연속 가뭄…곡물 생산 급감에 국가 행정·군대 기반 타격

구리·주석 끊기고 곡물 조달 차질…현대 글로벌 공급망 위기에 경종

This image released by Universal Pictures shows a scene from "The Odyssey." (Melinda Sue Gordon/Universal Pictures via AP)

This image released by Universal Pictures shows a scene from "The Odyssey." (Melinda Sue Gordon/Universal Pictures via AP)

[서울=뉴시스]심지혜 기자 = "우리의 청동기 시대가 무너지고 있소."

영화 '오디세이' 후반부에 등장하는 대사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기원전 1200년 전후 동지중해 전역을 강타한 후기 '청동기 문명 대붕괴(Late Bronze Age Collapse)'를 암시한 대목이다.

트로이 전쟁이 끝난 직후,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와 무역망을 자랑하던 당대의 초강대국들이 불과 수십 년 만에 왜 연쇄 도미노처럼 붕괴했을까.

기후고고학계에 따르면 당시 아나톨리아의 지배자 히타이트 제국과 그리스 미케네 궁전국가, 레반트 해안의 무역거점 우가리트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파괴된 근본 원인은 3000년 전 지중해를 덮친 '기후변화에 따른 초연쇄 대가뭄'과 '글로벌 공급망 마비'의 결합 때문으로 분석된다.

대서양 변동이 부른 기후 재앙… 나이테에 각인된 '3년 연속 가뭄'

오디세우스의 귀향길은 오늘날 튀르키예 북서부 트로이에서 그리스 서부 이타카로 향하는 바닷길을 무대로 한다.

오디세우스가 건너던 바다는 당시 여러 문명을 잇는 교역로이기도 했다. 에게해의 그리스에는 미케네 궁전국가들이 있었고, 바다 건너 지금의 튀르키예 지역인 아나톨리아에는 히타이트 제국이 자리했다. 그 남쪽인 시리아·레바논 연안에는 우가리트 같은 항구도시들이 있었다. 이들은 바닷길을 통해 곡물과 구리·주석을 주고받는 '초연쇄 교역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서울=뉴시스] 유럽과 지중해 지역에서 나타난 여름 가뭄의 공간 분포. 위는 1607~1608년과 1607~1611년, 아래는 1927~1928년과 1927~1930년의 연속 가뭄 시기를 재구성한 결과다. 붉은색이 짙을수록 건조한 상태를, 파란색이 짙을수록 습한 상태를 나타낸다. 오른쪽 아래 화살표는 아나톨리아(현 튀르키예) 지역을 가리킨다. (사진=네이처 논문 '기원전 1198~1196년경 히타이트 붕괴와 동시에 나타난 극심한 수년간의 가뭄')

[서울=뉴시스] 유럽과 지중해 지역에서 나타난 여름 가뭄의 공간 분포. 위는 1607~1608년과 1607~1611년, 아래는 1927~1928년과 1927~1930년의 연속 가뭄 시기를 재구성한 결과다. 붉은색이 짙을수록 건조한 상태를, 파란색이 짙을수록 습한 상태를 나타낸다. 오른쪽 아래 화살표는 아나톨리아(현 튀르키예) 지역을 가리킨다. (사진=네이처 논문 '기원전 1198~1196년경 히타이트 붕괴와 동시에 나타난 극심한 수년간의 가뭄')

스웨덴 스톡홀름대 연구진이 지구시스템 모델을 이용해 8000년에 걸친 지중해 기후변화를 재현한 결과,  대서양의 해양 순환 변동과 지구 궤도 변화가 겹치면서 기원전 1250년 무렵 동지중해 일부 지역에 극심한 가뭄이 발생했다. 오랫동안 건조화가 진행된 레반트 지역에서는 그 영향이 더욱 컸다.

고대 나무에는 당시 가뭄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게재된 스톡홀름대 연구진의 고르디온 유적 목재 나이테 분석에 따르면, 히타이트 제국 멸망 직전인 기원전 1198~1196년 무렵 3년 연속으로 파괴적인 극한 가뭄이 몰아친 것으로 확인됐다.

스웨덴 스톡홀름대 연구진이 지구시스템 모델을 이용해 8000년에 걸친 지중해 기후변화를 재현한 결과, 지구 궤도 변화에 따른 장기 건조화에 대서양의 해양·대기 변동이 겹치면서 기원전 1250년 무렵 동지중해 일부 지역에 극심한 가뭄이 발생했다. 오랫동안 건조화가 진행된 레반트 지역에서는 그 영향이 더욱 컸다.

고대 나무에는 당시 가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무는 수분이 부족하면 생장이 둔화돼 나이테가 좁아지고 탄소동위원소 비율도 달라진다. 2023년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논문을 발표한 연구진은 중앙아나톨리아 고르디온 유적에서 나온 향나무류 목재의 나이테 폭과 탄소동위원소를 분석한 결과, 히타이트 제국이 무너진 시기와 겹치는 기원전 1198~1196년 무렵 3년 연속 극한 가뭄이 몰아친 것으로 확인됐다. 기원전 1198~1187년 12년 가운데 6~8년도 건조한 해에 해당했다.

연구진은 한 해의 가뭄에는 저장 곡물과 수자원 시설로 대응할 수 있지만 극한 가뭄이 여러 해 이어지면 국가 차원의 대비책도 한계에 이르렀다고 분석했다. 당시 히타이트 문서에도 곡물 부족을 보여주는 기록이 남아 있다.

히타이트 수도 하투사에서 출토된 작물에서도 건조화의 영향이 확인됐다. 국제학술지 '더 홀로센'에 발표된 연구는 밀과 보리 등 고대 작물의 탄소·질소동위원소를 분석해 청동기 후기부터 철기시대까지의 농업환경 변화를 추적했다.

연구에 따르면 청동기 후기 하투사에서는 물과 거름 등의 투입을 줄이는 대신 넓은 농지를 경작해 곡물을 확보하는 방식이 활용됐다. 평상시에는 많은 곡물을 확보할 수 있지만 강수량이 줄면 여러 해에 걸쳐 수확량이 감소하거나 흉작이 발생할 위험이 높았다.

[유니버설 픽처스=AP/뉴시스] 영화 '오디세이'의 한 장면. 왼쪽부터 케페우스 역의 지미 곤잘레스, 오디세우스 역의 맷 데이먼, 에우리로코스 역의 히메시 파텔. 2026.07.22.

[유니버설 픽처스=AP/뉴시스] 영화 '오디세이'의 한 장면. 왼쪽부터 케페우스 역의 지미 곤잘레스, 오디세우스 역의 맷 데이먼, 에우리로코스 역의 히메시 파텔. 2026.07.22.

가뭄·침입에 교역 마비까지…함께 무너진 청동기 문명

가뭄이 길어지자 곡물 부족은 국가 시스템의 위기로 번졌다. 당시 왕궁은 농민에게서 거둔 곡물을 저장했다가 군인과 관료, 무기 제작 기술자 등에게 다시 나눠줬다. 흉작이 거듭되면서 먹거리뿐 아니라 군대와 행정조직을 유지할 곡물도 부족해졌다. 도시를 지킬 국방력마저 완전 와해됐다.

가뭄으로 인한 대기근은 생존을 위한 대규모 민족 이동을 촉발했다. 2013년 국제학술지 ‘플로스 원’에 게재된 논문에 따르면 연구진은 동지중해 키프로스의 라르나카 소금호수 퇴적층의 꽃가루 데이터 분석 결과, 농업 쇠퇴 직후 '바다 민족(Sea Peoples)'이라 불리는 해상 집단들이 수렵·약탈자로 변모해 지중해 연안 도시들을 연쇄 습격하기 시작했다.

연구진은 가뭄에 따른 흉작과 식량난이 인구 이동을 불러오고, 여기에 해상 침입과 전쟁까지 겹치면서 연안도시의 붕괴를 앞당겼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도시 파괴는 청동기 문명의 상징이던 '금속 공급망'을 끊어 놓았다. 당시 핵심 자원인 청동을 만들려면 키프로스의 구리와 아프가니스탄 등 수천㎞ 떨어진 외지에서 수입하는 주석을 섞어야 했다. 연안 무역항 우가리트가 침략당해 바닷길이 막히자, 농기구와 무기를 생산할 원자재 수입이 전면 중단되며 교역망에 의존하던 다른 문명국들까지 연쇄 파산으로 이어졌다.

국제학술지 '글로벌 환경 변화'의 네트워크 분석 연구(2024년)에 따르면, 원거리 교역에 고도로 의존하던 당시 청동기 사회는 개별 국가가 아무리 견고하더라도 핵심 거점 한곳이 무너지면 시스템 전체가 마비되는 상호의존적 취약성을 품고 있었다.

3200년 전 동지중해를 집어삼킨 청동기 시대의 붕괴는 지정학적 리스크, 기후 재난, 원자재 공급망 단절이 복합 작용할 경우 고도로 연결된 현대의 글로벌 공급망 생태계 역시 한순간에 급격한 시스템 붕괴를 맞이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고대사의 강력한 메시지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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