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메인에 뉴시스 채널 추가하기!

물길이 산세가 되고 흙빛이 풍경으로…채성필의 '묘법'

등록 2026/10/14 13:41:44

수정 2026/10/14 14:04:37

8년 만에 갤러리그림손 개인전…11월 16일까지

흙과 물로 시간의 흔적 새긴 신작 '묘법' 공개

채성필, 물의 초상(Portrait d_eau 260516). 162x130cm. 캔버스에 천연안료. 2026 *재판매 및 DB 금지

채성필, 물의 초상(Portrait d_eau 260516). 162x130cm. 캔버스에 천연안료. 2026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푸른 화면에 물길이 굽이친다. 짙은 파란색 사이로 구불구불한 선이 뻗어나간다. 어떤 그림은 거센 물결처럼 화면을 가득 채우고, 어떤 그림에는 단 한 줄의 흔적만 남았다.

화가가 붓으로 그린 선이 아니다. 물이 흘러가며 만들어낸 길이다.

채성필의 개인전 '흙, 물 그리고 시간의 묘법'이 15일부터 서울 인사동 갤러리그림손에서 열린다. 2018년 갤러리그림손 개관 10주년 기념전 이후 이곳에서 8년 만에 여는 개인전이다.

"제가 그리는 게 아니라 그려지게 하는 겁니다."

14일 갤러리그림손에서 만난 채성필(54)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기법'이 아닌 '자연의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땅에 물이 고여 넘치면 흐르게 되잖아요. 흙을 씻어내고 길을 만들면서 지나갑니다. 그 현상을 그대로 화면에 옮기는 겁니다."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14일 갤러리그림손에서 채성필 작가가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2026.10.14. hyun@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14일 갤러리그림손에서 채성필 작가가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2026.10.14.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채성필의 그림은 흙에서 시작된다. 직접 구한 흙을 물에 담가 고운 입자만 걸러낸다. 그렇게 얻은 흙물과 천연 안료가 회화의 재료다. 흙에서 자란 풀을 엮어 붓을 만들기도 한다.

제작 과정도 독특하다. 화판을 바닥에 내려놓고 흙과 안료를 뿌리거나 붓으로 흔적을 남긴다. 때로는 액션 페인팅처럼 몸을 움직이며 작업한다.

하지만 그림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는 순간은 그다음이다.

화판을 세우고 물을 더하면 중력에 따라 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물줄기는 안료 사이를 가르며 길을 낸다. 작가는 화면 뒤에서 화판을 기울여 방향과 흐름을 조절한다.

"한 줄로 쭉 가는 작품도 어느 각도로 세울지, 어느 정도까지만 흐르게 할지는 계산된 행위입니다. 하지만 만들어지는 것 자체는 제가 아니죠."

작가가 물길의 방향을 정하지만 실제 흔적을 만들어내는 것은 물이다. 때로는 흐름을 중간에 멈추고, 때로는 끝까지 흘려보낸다.

작가의 의지와 자연의 움직임이 하나의 화면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에게 물의 흐름은 단순한 물리적 움직임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중첩되는 시간의 움직임이다. 물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선은 그 시간이 만들어낸 기록이다.

채성필, 대지의 몽상(Rêve de terre 260712). 150x150cm. 캔버스에 흙과 수묵. 2026 *재판매 및 DB 금지

채성필, 대지의 몽상(Rêve de terre 260712). 150x150cm. 캔버스에 흙과 수묵. 2026 *재판매 및 DB 금지

물가에서 발견한 흙, 자신만의 '먹'이 되다

채성필이 흙을 회화의 재료로 삼게 된 데에는 우연한 경험이 있었다.

서울대학교 동양화과에서 공부하던 시절, 그는 여행과 낚시를 즐겼다.

어느 날 아침,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스케치를 하려다 난감한 상황에 놓였다. 스케치북만 가져왔을 뿐 그림을 그릴 도구가 없었던 것이다.

주변에 있던 갈대를 꺾어 진흙을 묻혀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스케치를 했더니 재미있더라고요."

뜻밖의 경험은 새로운 재료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그는 흙이 동양화의 먹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색과 질감은 달라도 자연을 표현하는 재료라는 점에서 통한다고 느꼈다.

"저에게는 먹과 다른 나만의 먹이 흙이었던 거죠."

동양화를 공부한 화가는 그렇게 흙에서 자신만의 회화 언어를 찾았다.

전시장에서는 흙과 물이 만들어낸 다양한 표정을 만날 수 있다. 짙은 푸른색 화면에서는 물길이 소용돌이치고, 녹색과 황토색 화면에서는 가느다란 선들이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화면을 빼곡하게 채운 선들은 저마다 다른 굵기와 밀도를 지닌다. 물이 흐르다 멈추고, 갈라지고, 다시 합쳐진 자리에 남은 흔적이다.

그 결을 만들어낸 것은 붓끝이 아니라 물의 흐름이다.

채성필, 묘법(Inscription N2026011). 200x160cm. 캔버스에 천연안료. 2026 *재판매 및 DB 금지

채성필, 묘법(Inscription N2026011). 200x160cm. 캔버스에 천연안료. 2026 *재판매 및 DB 금지

박서보의 '묘법'은 쓰기, 채성필은 새김

채성필의 회화는 땅에서 시작해 물의 흐름으로, 다시 그 흐름이 남긴 흔적으로 확장됐다.

'익명의 땅'과 '대지의 몽상'에서는 땅이 품은 시간과 기억, 원초적인 자연의 이미지를 탐구했다. '물의 초상'에서는 흙과 만난 물이 중력에 따라 흐르고 갈라지고 합쳐지는 움직임에 주목했다.

이번에 새롭게 선보이는 '묘법(Inscription)'은 그 흐름이 남긴 흔적 자체에 집중한 작업이다.

화면을 가득 채운 수직의 선들은 붓으로 그린 것이 아니다. 흙과 물, 안료가 중력에 따라 움직이고 스며들면서 만들어낸 자국이다. 멀리서는 하나의 색면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서로 다른 굵기와 밀도의 흔적이 드러난다.

채성필이 신작에 붙인 '묘법(描法)'은 한국 현대미술에서 박서보를 떠올리게 하는 명칭이다.

박서보가 자신의 묘법을 프랑스어로 '쓰기'를 뜻하는 에크리튀르(Écriture)라고 불렀다면, 채성필은 '새김'과 '기록'의 의미를 지닌 인스크립션(Inscription)을 사용한다.

"그려진다기보다 땅을 새기고 지나가는 흔적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같은 명칭을 사용하는 데 박서보를 의식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박서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도 자신의 작업에 고유한 표현 방식이 있기 때문에 굳이 피할 이유는 없었다는 취지로 답했다.

그는 동양화에서 묘법이 그림을 표현하는 행위와 방법을 뜻하는 개념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흙을 자신만의 먹으로 받아들인 경험에서 시작된 회화는 이제 물과 시간이 화면에 새긴 흔적을 탐구하는 단계로 이어졌다.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14일 갤러리그림손에서 개인전을 여는 채성필 작가가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2026.10.14. hyun@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14일 갤러리그림손에서 개인전을 여는 채성필 작가가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2026.10.14.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파리서 3년간 전시마다 완판…"운이 좋았죠"

채성필은 서울대학교 동양화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은 뒤 프랑스로 건너갔다. 렌느2대학교에서 조형예술학 석사를 취득하고 파리1대학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프랑스 진출 초기에는 예상하지 못한 성공을 경험했다. 작가에 따르면 2005년부터 2007년까지 현지에서 연 전시마다 작품이 모두 팔렸다.

당시 작품 가격은 약 3000유로, 한화로 400만원 수준에서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작품 판매가 이어지면서 프랑스에 집도 마련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갔는데 거기서 돈을 벌어 집도 샀어요. 정말 운이 좋았던 경우죠."

현재 파리에 거주하며 서울과 유럽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작품은 프랑수아 피노를 비롯해 국립현대미술관, 영은미술관, 파리시청, 세르누스키 미술관, 카카오, 신한은행 등 국내외 주요 컬렉션에 소장돼 있다.

채성필, 묘법(Inscription N2026012). 200x160cm. 캔버스에 천연안료. 2026 *재판매 및 DB 금지

채성필, 묘법(Inscription N2026012). 200x160cm. 캔버스에 천연안료. 2026 *재판매 및 DB 금지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왔지만, 그가 줄곧 붙잡아온 재료는 흙과 물이다.

지난 4월에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채성필 흙 그림전_익명의 땅'을 열고 30여 년의 작업 세계를 조명했다. 이번 갤러리그림손 개인전에서는 대표 연작과 함께 신작 '묘법'을 공개한다.

캔버스에 흙과 물이 남긴 흔적은 보면 볼수록 낯익다. 푸른 물길은 산세가 되고, 녹색 화면을 타고 흘러내린 선들은 깎아지른 절벽의 바위 결처럼 보인다. 도끼로 찍어낸 듯한 필선으로 암벽을 표현하는 전통 산수화의 부벽준(斧劈皴)도 떠오른다.

겸재 정선의 금강산, 청전 이상범의 산길과 흙빛 풍경이 겹쳐진다. 구체적인 산도, 길도 그리지 않았지만 어딘가 우리 산천의 기운이 서려 있다.

동양화를 공부한 화가의 눈과 몸에 축적된 우리 산수의 기억이 읽힌다. 자연이 그린 추상화에서 오래된 우리 산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전시는 11월 16일까지. 관람은 무료.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글자크기 설정

상단으로 이동
로딩중로딩아이콘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