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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인 안무 대신 '날것' 입다…'즉흥'에 꽂힌 K-무용계

등록 2026/09/26 09:10:00

바흐·스트릿부터 시나위까지, 날것의 신체 언어

무질서 아닌 훈련된 감각…해방과 시험대의 두 얼굴

[서울=뉴시스]지난 10일 서울 광진구 나루아트센터에서 임현정x김재덕의 '그래도, LIVE(라이브)' 중 '댄싱 바흐' 공연이 펼쳐졌다. (사진=안무가 김재덕·시댄스 박상윤 제공)

[서울=뉴시스]지난 10일 서울 광진구 나루아트센터에서 임현정x김재덕의 '그래도, LIVE(라이브)' 중 '댄싱 바흐' 공연이 펼쳐졌다. (사진=안무가 김재덕·시댄스 박상윤 제공)

[서울=뉴시스] 최희정 기자 = 정형화된 안무와 짜인 동선 대신 '즉흥'에 기반한 춤이 올 가을 무용계를 관통하고 있다. 국공립 단체의 실험적인 신작부터 이태원 거리의 스트릿 댄스, 개인 안무가의 철저하게 계산된 솔로 무대까지, 장르를 불문하고 날것의 신체 언어가 동시다발적으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즉흥의 묘미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것은 개인 안무가의 무대다. 현대무용 안무가 김재덕은 지난 10일 나루아트센터 대공연장에서 개최된 '그래도, LIVE'(제29회 서울세계무용축제 공식 프로그램)에서 피아니스트 임현정과 협업한 '댄싱 바흐'를 통해 순수 즉흥 춤을 선보였다.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이 지닌 다층적 리듬을 즉흥적인 몸짓으로 시각화한 작업이다.

조명 타이밍 외에 약속된 동작 없이 무대를 소화한 김재덕은 최근 뉴시스와의 통화에서 "즉흥이 아니었던 것처럼 즉흥하는 것이 목적"이라며 "동선과 안무 크기를 치밀하게 배분하는 등 매 순간 각도와 미학을 계산한다"고 강조했다. 즉흥이 무질서한 움직임이 아니라, 관객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고도로 훈련된 감각을 요구한다는 의미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서울시무용단 '무감서기' 무용수들이 10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신작 '무감서기(Gut: Whispering Steps)' 언론시연회를 하고 있다.'무감서기'는 굿의 막바지에 펼쳐지는 행위로 굿을 의뢰한 사람이 무녀 옷을 입고 음악에 맞춰 즉흥적으로 춤을 추는 것을 뜻한다. 2026.09.10. pak7130@newsis.com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서울시무용단 '무감서기' 무용수들이 10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신작 '무감서기(Gut: Whispering Steps)' 언론시연회를 하고 있다.'무감서기'는 굿의 막바지에 펼쳐지는 행위로 굿을 의뢰한 사람이 무녀 옷을 입고 음악에 맞춰 즉흥적으로 춤을 추는 것을 뜻한다. 2026.09.10. [email protected]

극장을 벗어난 즉흥의 에너지는 거리로 쏟아진다. 오는 10월 3~4일 이태원로 일대에서 열리는 '2026 K-웨이브 댄스 페스티벌'은 대형 극장이라는 정형화된 공간을 탈피해 스트릿·클럽 댄스 특유의 자유분방함을 선보인다.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찰나의 신체성에 집중하는 스트릿 댄서들의 날것 같은 에너지가 대중과 직접 호흡할 예정이다.

정통 무대에서도 즉흥 실험은 계속된다. 국립무용단은 10월 8~11일 신작 '더블빌: 시나위'를 통해 한국 전통 음악의 즉흥 양식인 시나위를 춤으로 치환한다.

1944년생 거장 배정혜 안무가는 무작정 감각에 기대는 즉흥이 아니라, 몸에 오랜 시간 축적된 전통의 호흡을 시나위 선율 위에서 자유롭게 풀어내는 방식을 택했다. 서로 다른 계보의 전통 춤사위들을 하나로 해체하고 엮어, 폭포수 아래서 어우러지는 흐드러진 춤판의 즉흥성을 시각화한다.

 [서울=뉴시스]10일 국립극장 국립무용단 연습실에서 신작 '더블빌:시나위' 시연이 진행됐다. 배정혜의 '살풀이 생' 장면. (사진=국립극장 제공)

[서울=뉴시스]10일 국립극장 국립무용단 연습실에서 신작 '더블빌:시나위' 시연이 진행됐다. 배정혜의 '살풀이 생' 장면. (사진=국립극장 제공)

반면 1994년생 신예 배진호 안무가는 시나위의 구조적 원리인 '독립과 조화'를 무용수들의 관계성에 대입했다. 초반부 전자음악 비트에 맞춰 날 선 에너지를 뿜어내던 무용수들은 후반부 몰아치는 전통 타악 장단 속에서 날것의 즉흥성을 찾아 폭발한다.

그러나 '즉흥'이 대극장 군무와 만났을 때는 한계를 노출한다는 지적도 있다.

최근 막을 내린 서울시무용단 '무감서기'는 굿판에서 신명에 겨워 추는 춤인 '무감(舞鑑)'을 모티브로 삼아 전통 굿을 현대적 미장센과 웅장한 대극장 스케일로 풀어내며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전통과 현대, 안무와 즉흥 사이에서 서성거렸다"는 성기숙 평론가의 평처럼 일부 아쉬움을 남겼다. 무속 본연의 흐트러진 감성과 즉흥성을 살리지 못한 채 전작 '일무'의 군무 구성을 답습했다는 지적이다.

'무감'은 정해진 형식 없이 내면의 감각을 즉흥적으로 쏟아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감서기'에서는 오히려 대형과 열을 맞추는 형식화된 패턴이 부각되며 본래의 주제 의식과 엇박자를 냈다는 것이다.

 [서울=뉴시스]10일 국립극장 국립무용단 연습실에서 신작 '더블빌:시나위' 시연이 진행됐다. 배진호의 'AHRA'(아라) 장면. (사진=국립극장 제공)

[서울=뉴시스]10일 국립극장 국립무용단 연습실에서 신작 '더블빌:시나위' 시연이 진행됐다. 배진호의 'AHRA'(아라) 장면. (사진=국립극장 제공)

이처럼 성공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최근의 '즉흥' 무대는 인위적으로 기획된 유행은 아니다. 김재덕 안무가는 현 상황에 대해 "우연의 일치일 뿐, 트렌드는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럼에도 안무가들이 즉흥에 기대는 이유는 분명하다. 무용수는 짜인 틀을 완수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직관적인 자유로움을 얻고, 안무가는 무용수에게서 좋은 움직임을 효율적으로 이끌어내는 창작 도구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올 가을 무용계를 달구는 '즉흥'은 철저한 훈련과 계산이 전제되지 않으면 금세 밑천을 드러낼 수 있는 양날의 검이다. 대중에게는 단 한 번뿐인 찰나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하지만, 창작자에게는 극도로 예민한 감각과 무대 장악력을 요구하며 예술적 역량을 가늠하는 날카로운 시험대가 되고 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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