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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흥미로운 무대, 사람들은 훌륭한 배우"…'리모트 서울'

등록 2026/04/04 20:12:06

수정 2026/04/04 22:18:23

창작 집단 리미니 프로토콜의 대표작 '리모트 X', 국내 초연

30여 명의 참가자, 헤드폰의 인공지능 안내 따라 도시 이동

카렌바워 연출 "도시 특징 파악 반영…한국, 튀는 행동 꺼려"

'리모트 서울'(사진=GS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리모트 서울'(사진=GS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김주희 기자 = 헤드폰에서 들려오는 인공지능 음성 안내에 따라 지하철 환승 개찰구 앞에 자리를 잡는다. 음성은 이내 공연 시작을 알린다. 그러자 익숙한 통로는 무대가 되고,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은 배우처럼 비춰진다.

일상의 풍경을 낯설게 바라보게 하는 참여형 퍼포먼스 '리모트 서울'이 지난 3일 국내 초연을 시작했다.

4일 서울 강남구 GS아트센터에서 만난 '리모트 서울'의 현지 연출 외르크 카렌바워는 "우리의 일상만큼 좋은 무대와 소재거리가 없다. 도시는 굉장히 흥미로운 무대"라고 말했다.

독일의 창작 집단 '리미니 프로토콜'의 대표작인 '리모트 X'는 30여명의 참여자가 헤드폰을 착용한 채 인공 음성 안내에 따라 도시를 함께 걸으며 완성하는 '오디오 워킹 투어형' 공연이다. 2013년 독일 베를린에서 초연한 후 미국 뉴욕, 영국 런던, 중국 상하이 등 전 세계 32개국, 약 65개 도시에서 제작·공연됐다.

'리모트 서울' 연출 외르크 카렌바워. (사진=GS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리모트 서울' 연출 외르크 카렌바워. (사진=GS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카렌바워 연출은 "'리모트'는 걸어 다니며 원격 조정된다는 뜻의 '리모트컨트롤'과 일상에서 사람들을 전부 다 끄집어내 일상을 다시 돌아보자는 재부팅의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소개했다.

'리모트 서울'은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출발해 도보와 지하철을 이용해 약 120분간 강남 지역을 누비도록 구성됐다.

카렌바워 연출은 지난해 12월 처음 방한해 경로를 찾아봤고, 3주전부터는 다시 서울에 머물며 도시 지형과 사회문화적 배경, 시민들의 행동을 관찰·분석해 이를 기반으로 이동 동선과 이야기를 완성했다.

도시별로 차이가 있지만 출발은 되도록 '묘지'에서 이뤄진다. 이후 생동감 넘치는 거리로 나아가는 방식이다.

카렌바워 연출은 "굉장히 침착하고 조용한 장소에서 시작하려고 한다. 우리 작품에는 '사후에 우리의 삶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주제가 담겨 있다"며 "영원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AI(인공지능)가 우리의 꿈과 생각을 어떻게 좌지우지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공연의 출발점에도 'AI와 집단의 관계'가 있다.

카렌바워 연출은 "보통 헤드폰을 쓰고 AI와 소통하는 경험은 나와 음성, 둘만의 대화처럼 느껴지는데, 여러 명이 함께 걸으며 AI와 소통할 때는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를 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공연 초기에는 AI 음성이 아닌 배우들이 녹음한 2800개 가량의 문장을 한 음절씩 잘라 조합하는 방식이 사용됐다. 그는 "최대한 인공적으로 들리게끔 만들려고 했다. 이렇게까지 인공지능이 인간과 같은 말투로 변할 줄 모르고 시작했다"고 떠올렸다. 

인공적인 AI 목소리에 맞춰졌던 초점은 시간이 지나며 관객들의 반응으로 옮겨졌다. 카렌바워 연출은 "관객들의 반응을 얼마나 예상할 수 있는지 혹은 예상 밖인지에 흥미가 붙었다. AI가 지시하는 대로 하고 싶은지, 빠져나가고 싶은지 등 사람들의 반응에 더 초점을 맞추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접근은 도시를 무대로, 관객이 출연자가 되는 연출 방식으로 확장된다.

카렌바워 연출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도시는 굉장히 흥미로운 무대"라며 "사람들과 단체가 되어 이동할 때 협조 여부나 속도 등 예상할 수 없는 것을 보며 무대에서 연출하는 동기 부여를 받는다. 정해지지 않은 동선 속에 움직이는 사람들은 가장 훌륭한 배우"라며 미소지었다.

'리모트 서울' (사진=GS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리모트 서울' (사진=GS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참여자들은 음성 안내를 들으며 현충원 묘비 사이를 거닐거나, 손으로 쌍안경 모양을 만들어 주변을 둘러본다. 둥글게 둘러서 서로를 관찰하기도 한다.

수십 명이 만들어내는 낯선 풍경에 지나가던 이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그 장면을 바라보기도 한다. 마치 참여자들이 배우가 된 것 같은 모습이다.

인공지능 목소리는 이 사이사이 계속해서 삶과 죽음부터 민주주의, 집단지성 등 다양한 이야기를 건넨다.

카렌바워 연출은 "서울은 '리모트X'를 하기에 적합하고 좋은 도시"라며 "대중교통도 시간에 맞춰 오고, 길거리나 차도에 언제 사람들이나 차가 많을지 예상 가능한 도시다. 약속이라도 하듯 돌아가기 때문에 저의 공연이 진행되기에 적합하다"고 말했다.

다만 어려운 점도 있다. 한국 특유의 문화 때문이다.

그는 "서울 공연의 애로사항 중 하나는 대체적으로 (사람들이) 묻혀 가려는 성향이 강한 것 같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존재감을 드러내기 바쁘다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는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하고, 안전권 안에 묻혀 지내는 걸 선호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하철역 에스컬이터에서 발레 동작을 지시하는 음성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 많다는 점을 들었다. 지하철 승객들 대부분이 휴대폰을 보고 있어 참여자들에게 시선을 끌어오기 어렵다는 점도 짚었다.

도시의 특성은 공연 내용에도 반영돼, 도시별로 다른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카렌바워 연출은 "도시의 특징을 파악해 이를 스크립트에 반영하려고 한다"며 "한국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예의가 있다. 대중교통에서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문화적으로는 튀게 행동하는 걸 꺼린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울 공연에서는 '개성을 존중해야 하는지, 평등을 위해 규범을 더 우선시 해야하는지'를 묻는 질문이 추가됐다.

그는 "유럽 같은 도시에서는 자신의 개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들이 많이 보였고, 한국에서는 대중을 존중하고 나를 낮추는 모습이 많이 보여서 이 질문을 했다"고 설명했다.

'리모트 서울'  (사진=GS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리모트 서울'  (사진=GS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120여분간 인공지능의 음성을 듣다 보면 자연스레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음성은 인간의 유한성 등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건넨다.

카렌바워 연출은 "요즘은 챗GPT나 AI에도 죽음과 삶에 대해 묻는 시대다. 과연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정말 AI와 나누고자 하는지, 아니면 인간을 흉내내는 AI와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리모트 서울'은 다음 달 10일까지 매주 금·토·일 진행된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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