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 넘어 오스카로…K-팝, 이제 '현상' 넘어 '주류 예술' 되다
등록 2026/03/16 13:46:29
케데헌,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서 2관왕
[서울=뉴시스] 케이팝 데몬 헌터스. (사진 = 넷플릭스 제공) 2026.01.1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글로벌 신드롬을 일으킨 넷플릭스 K-팝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이 미국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애니메이션상과 주제가상('골든(Golden)')을 동시에 거머쥔 것은 단순한 흥행의 결과가 아니다.
이는 K-팝이라는 장르가 가진 서사적 지평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자, 한국 문화의 원형이 서구 주류 사회의 보수적인 빗장을 열어젖혔음을 의미한다. 세계적인 확장에도 열렬한 일부 팬덤 문화로 평가절하된 K-팝이 '케이팝 데몬 헌터스'와 만나 그 지경이 크게 넓혀졌음을 재확인했다.
전통의 원형과 현대적 팝 아트의 조우
'케데헌'의 가장 큰 성취는 한국의 가장 깊숙한 정서인 '무속 신앙'과 '한(恨)'을 현대적인 문법으로 재해석했다는 점에 있다. 낮에는 화려한 아이돌로, 밤에는 악령을 물리치는 퇴마사로 활동하는 '헌트릭스'의 설정은 한국 전통 예인의 시초인 '무당'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이날 한국계 미국 작곡가 겸 가수 이재(EJAE)를 비롯 한국계 미국 가수들인 오드리 누나, 레이 아미가 가창한 '골든' 무대엔 판소리, 한복, 타악기 등 한국 전통 문화가 어우러졌다.
이번에 주제가 상을 받은 '골든(Golden)'은 이재 그리고 테디, 24(서정훈), 작곡팀 '아이디오'(IDO, 이유한·곽중규·남희동) 등 K-팝 기획사 더블랙레이블 작곡가들, 미국 작사가 겸 작곡가 마크 소넨블릭이 함께 만들었다. 한국계, 한국 뮤지션들이 오스카 주제가상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12년 전 한국계 뮤지션 카렌 오(Karen O)가 영화 '그녀(Her)'의 '더 문 송(The Moon Song)'으로 해당 부문 후보에 올랐으나, 당시 상은 '겨울왕국'의 '렛 잇 고(Let It Go)'에게 돌아갔다.
지난해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차트 '핫100'에서 통산 8주 1위를 차지한 '골든'은 애니메이션의 맥락과 곡의 구조가 드라마틱하게 맞물렸다. 비현실적인 고음은 주인공들의 염원을 극대화한다. 한국 프로듀서들은 세련된 팝 비트 위에 한국적인 애절함을 얹어,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는 보편적 카타르시스를 완성했다. K-팝이 더 이상 서구 팝의 아류가 아닌, 독자적인 미학 체계를 갖춘 예술 장르로서 권위를 획득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골든'은 여러 작곡가들의 공동 협업 시스템인 K-팝의 특성도 대변한다. 오스카상을 받은 최초의 K-팝인 '골든'은 4명 이상의 작곡가가 참여해 오스카를 받은 최초의 곡이다. 지금까지 해당 부문에서 4명 이상의 작곡가가 참여한 곡이 수상한 사례는 없었다.
[로스앤젤레스=AP/뉴시스]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 속 걸그룹 '헌트릭스'의 레이 아미(왼쪽부터), 이재(EJAE), 오드리 누나가 15일(현지 시간) 미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린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케데헌 주제가 '골든' 공연을 펼치고 있다. '골든'은 최우수 주제가상을 수상했다. 2026.03.16.
이재는 이날 수상 소감 도중 무대 뒤에 선 협업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소감을 마무리하려 했다. 하지만 공동 작곡가 중 한 명인 이유한이 감사의 말을 덧붙이려 뛰어든 순간, 퇴장 음악이 크게 흘러나오며 그의 목소리를 덮어버렸고 오스카 중계는 갑작스럽게 광고로 전환됐다.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는 해당 부문에 트로피를 최대 네 개까지 수여한다는 규정을 가지고 있다. 공동 작업자들의 기여도가 동등하다고 판단될 경우 음악 지부 집행위원회의 결정을 통해 이 같이 결정한다. '골든'처럼 작곡가가 5명 이상이면, 트로피 공동 소유 합의서에 서명해야 한다. 최근 팝 음악계는 '캠프' 형식으로 수많은 작곡가가 협업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모두 인정해 트로피를 뿌리면 오스카의 상징적인 가치가 희석될 수 있다고 판단해 이 같은 조항을 넣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는 "제가 어릴 때는 K-팝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놀리곤 했지만, 이제는 모든 사람이 우리의 노래와 모든 한국어 가사를 따라 부르고 있습니다.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날 '골든' 무대 앞 객석에선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에마 스톤 등 할리우드 톱스타들이 애니메이션 속 장면처럼 응원봉을 들고 즐기기도 했다.
'집단 지성'이 빚어낸 K-팝 제작 시스템의 승리
'케데헌'의 성취는 단순히 영화적 재미에 그치지 않고, K-팝 프로듀싱 시스템 자체가 지닌 산업적·미학적 완결성을 세계 무대에 증명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아카데미에 앞서 열린 '제68회 그래미 어워즈'에서 '골든'이 '베스트 송 리튼 포 비주얼 미디어' 부문을 수상한 것은 그 서막이었다.
그간 K-팝이 주로 거대한 팬덤을 기반으로 한 '현상'으로 소비됐다면, 이번 연쇄 수상은 K-팝의 '창작자 집단'이 지닌 예술적 역량을 공인받은 사건이다. 더블랙레이블 사단이 보여준 '송 캠프(Song Camp)' 형식의 협업은, 개인의 영감에 의존하던 기존의 문법을 넘어 철저히 계산된 미학과 정교한 사운드 엔지니어링의 결합이 어떻게 보편적인 감동을 자아낼 수 있는지 보여줬다.
[로스앤젤레스=AP/뉴시스] 이재(EJAE)가 15일(현지 시간) 미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린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 OST '골든'으로 최우수 주제가상을 받은 뒤 프레스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6.03.16.
그래미와 오스카가 동시에 주목한 지점은 곡의 완성도뿐만 아니라, 수많은 작곡가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K-팝 특유의 협업 프로덕션이 거둔 음악적 성과였다.
팬덤의 영역을 넘어 주류 미학의 중심으로
'케데헌'이 불러온 나비효과는 음악 차트를 넘어 문화 산업 전반의 지형도를 바꾸고 있다. 작품 속에 녹아든 한국적 미장센, 즉 호랑이, 까치, 김밥, 그리고 서울의 풍경은 전 세계 Z세대에게 가장 '힙(Hip)한' 텍스트로 각인됐다.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국중박) 관람객 650만 명 돌파와 방한 관광객 1870만 명이라는 기록적 수치는, K-팝이 단순히 듣는 음악을 넘어 시각적·공간적 정체성을 지닌 하나의 세계관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결국 '골든글로브' '그래미'에 이어 '오스카'까지 거머쥔 '케데헌'의 그랜드 슬램은 K-팝이 서구 팝의 변방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미학 체계와 제작 시스템을 갖춘 주류 예술 장르로 완전히 정착했음을 알리는 거대한 이정표다. "나와 닮은 이들을 보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한국계 캐나다인 매기 강 감독의 말처럼, 이제 K-팝은 정체성을 증명해야 하는 단계를 지나 세계 음악사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하고 있다.
◎공감언론 뉴시스 realpaper7@newsis.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