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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계 '명왕성 쇼크'?…인간 게놈 지도 뒤흔든 '어둠의 단백질'[사이언스 PICK]

등록 2026/05/24 09:00:00

수정 2026/05/24 09:26:24

유전학계, 그동안 무시해 온 수천 개 분자 '펩티데인'으로 공식 인정

인간 유전자 2만개 정설 깨지나…생물학계 '명왕성 퇴출' 급 대변혁

소아암·심장병 난치병 치료 열쇠 기대감 속 "세포 찌꺼기" 신중론도

DNA 사슬 관련 참고용 이미지. (사진=유토이미지) *재판매 및 DB 금지

DNA 사슬 관련 참고용 이미지. (사진=유토이미지)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윤현성 기자 = 인류의 생물학적 설계도로 불리는 인간 게놈 지도가 다시 쓰일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 과학계가 '존재하지만 아무런 기능이 없을 것'이라며 무시해왔던 이른바 '어둠의 단백질'들이 공식적인 연구 대상으로 인정받으면서다. 과거 태양계 9번째 행성이었던 명왕성이 왜소행성으로 재분류되며 천문학계를 뒤흔들었던 것과 유사한 '생물학적 대변혁'이 시작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된 최신 연구에 따르면 그간 유전학계에서 정식 유전자로 인정받지 못했던 수천개의 분자가 '펩티데인(Peptideins)'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고 공식 데이터베이스에 등재됐다. 생명과학의 근간을 이루는 단백질 코딩 유전자의 정의와 범주가 근본적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 게놈 2만개 유전자의 공식 깨지나…베일 벗은 '펩티데인'

현대 생물학의 정설에 따르면 인간 게놈에는 신체 기능을 수행하는 단백질을 만드는 정보를 담은 약 2만개의 유전자가 존재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정체불명의 기능을 수행하는 수천개의 '어둠의 단백질'이 세포 속에 숨어 있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이들 분자는 아미노산 길이가 매우 짧고 진화적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는 이유로 그동안 공식 유전자 목록에서 배제돼 왔다. 하지만 글로벌 연구진이 참여한 '트랜스코드 컨소시엄'이 주도한 이번 연구를 통해 이들의 실체가 실험으로 증명됐다.

연구팀은 어둠의 단백질을 만들 것으로 의심되는 7264개의 DNA 서열을 정밀 분석했다. 그 결과 이들 중 대다수가 실제 세포 내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15개 서열은 기존의 엄격한 기준을 충족해 공식 단백질 코딩 유전자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연구진은 나머지 수천개의 짧은 단백질들을 펩타이드(Peptide)와 단백질(Protein)의 합성어인 펩티데인으로 명명하고 새로운 연구 범주로 확립했다.

생물학계의 '명왕성 모먼트'…데이터베이스 대대적 재편

이번 발견은 천문학계의 '명왕성 퇴출 사건'에 비견된다.006년 국제천문연맹이 행성의 기준을 재정립하며 명왕성을 왜소행성으로 재분류했듯, 생물학계 역시 단백질 유전자의 기준을 다시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연구에 참여한 유럽 분자생물학 연구소(EMBL-EBI)의 생물정보학자 조나단 머지는 이번 상황을 "우리는 지금 일종의 '명왕성 모먼트(Pluto moment)'에 있다"고 규정했다. 태양계 외곽에서 수많은 왜소행성이 발견되며 행성의 정의가 바뀐 것처럼, 게놈 안에서 펩티데인이라는 새로운 집단이 발견됨에 따라 기존 단백질의 분류 체계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세계적인 유전자 데이터베이스인 GENCODE 등은 펩티데인을 위한 별도의 카테고리를 신설하기 시작했다. 기존에 '표준' 단백질로 분류됐던 것 중 일부는 연구 결과에 따라 펩티데인으로 등급이 조정되고, 반대로 무시됐던 펩티데인이 정식 단백질 유전자로 승격되는 대대적인 이동이 일어날 전망이다.

소아암·심장 질환 등 '숨은 열쇠' 될까…'옥석' 가리기 숙제

학계가 펩티데인에 주목하는 이유는 단순히 분류 체계의 변화 때문만이 아니다. 이들이 인체의 생리 현상과 질병 발생에 관여하고 있다는 증거도 속속 드러나고 있어서다.연구진에 따르면 50개 이상의 펩티데인이 세포 생존 등에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징후가 발견됐다. 특히 일부 펩티데인은 소아에게 발생하는 치명적인 뇌종양 등 공격적인 암 발병의 요인이 되거나, 심장 기능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컨소시엄 공동 리더를 맡은 네덜란드 프린세스 막시마 소아암 센터의 시스템 생물학자 세바스티안 판 헤슈는 "이제 더 이상 이들(펩티데인)의 존재를 못 본 척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며 펩티데인 연구가 난치병 치료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물론 펩티데인의 가치를 둘러싼 신중론도 존재한다. 펩티데인 중 상당수는 단백질을 제조하는 복잡한 공정 중에 우연히 만들어진 '세포 내 부산물'에 불과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상당수의 펩티데인은 생성 직후 세포 내에서 빠르게 분해되는 특성을 보인다.우쉐빙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분자생물학 교수는 "펩티데인 중 일부는 독립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행위자가 아니라 세포 기계장치가 만들어낸 찌꺼기일 수 있다"며 "향후 연구를 통해 어떤 펩티데인이 실질적인 기능을 하는 '옥석'인지 가려내는 과정이 필수적이다"라고 분석했다.결국 이번 연구는 인간 게놈이라는 거대한 설계도에서 우리가 아직 읽지 못했던 수많은 페이지가 존재함을 확인시켜 준 계기가 됐다.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펩티데인의 정체가 하나씩 밝혀짐에 따라, 암을 비롯한 정복되지 않은 질병의 원인을 규명하려는 인류의 도전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크리스토프 디트리히 교수는 "펩티데인은 새로운 연구의 물결을 일으킬 거대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며 "이는 생물학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여는 중대한 돌파구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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